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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거 뱅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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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거 뱅크 사건은 1904년 러일 전쟁 중 러시아 발트 함대가 영국 어선을 일본 어뢰정으로 오인하여 공격한 사건이다. 러시아는 일본의 기습을 우려하여 일본 어뢰정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지만, 정보의 혼선과 오판으로 인해 영국 어선을 공격했다. 이 사건으로 영국과 러시아 간의 외교적 갈등이 심화되었고, 영국 여론의 반러시아 감정이 고조되었다. 국제 조사 위원회는 러시아의 과실을 인정하고, 러시아는 배상금을 지급했다. 이 사건은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의 패배에 영향을 미쳤으며, 결과적으로 대한제국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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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거 뱅크 사건
사건 개요
사건명도거 뱅크 사건
다른 이름헐 사건
굴 사건 (Gull스키 사건)
러시아어 명칭Гулльский инцидент (굴스키 인치덴트)
날짜1904년 10월 21일 ~ 22일
위치도거 뱅크
원인러시아 발트 함대의 오인 사격
결과국제적인 항의
러시아의 배상
교전 세력
교전국 1러시아 제국
교전국 2영국 어선
지휘관 및 지도자
러시아 제국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전력
러시아 제국 해군제2태평양함대 (발트 함대)
영국 어선헐 트롤어선단
피해 규모
러시아 제국경미한 피해
영국 어선3척 침몰
다수 부상
2명 사망

2. 역사적 배경

1904년 러일 전쟁 발발과 함께, 러시아 제국일본 제국 해군에 대항하기 위해 발틱 함대를 극동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발틱 함대는 영국의 제해권 아래 있는 북해를 통과해야 했고, 일본과의 영일 동맹 때문에 기습 공격에 대한 우려가 컸다. 러시아는 전 세계에 에이전트를 고용하여 일본 함대의 동향을 감시했지만, 에이전트들은 포상금을 노리고 허위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 인해 발틱 함대는 신경과민 상태에 빠졌고, 스카게라크 해협을 통과한 후 북해에서 일본 어뢰정의 매복에 대한 잘못된 정보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다.[31][32][33]

2. 1. 러일전쟁과 발틱 함대

1904년 러일 전쟁을 벌이고 있던 러시아 제국은 해상 전력으로 일본 제국 해군에 대항하기 위해 발트해를 담당하는 발틱 함대의 주력을 제2태평양 함대로 재편하고 극동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31] 10월 15일,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이끄는 발틱 함대는 리바우 군항을 출항했다.[22]

당시 일본은 세계 바다의 지배자인 영국과 영일 동맹 관계에 있었다.[31] 따라서 러시아는 일본 함대가 극동까지의 경로 어딘가에서 기습 공격을 할 것이라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31] 러시아는 세계 각지에서 에이전트를 고용하여 일본 함대의 동향을 감시했지만,[32] 이는 오히려 화근이 되었다. 에이전트들은 포상금을 노리고 일본의 어뢰정을 발견했다는 정보를 세계 각지에서 보내왔기 때문이다.[23]

스카게라크 해협을 빠져나와 북해로 나온 발틱 함대는 신경과민에 빠져 있었다. 발트해를 나오면 영국 제해권 하에 놓이기 때문이었다. 러시아가 고용한 에이전트는 이 해역에 일본의 어뢰정이 매복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일본 측이 거짓 정보를 흘렸다는 증언도 남아 있다.[33][24]

2. 2. 영국과의 관계

1904년 러일 전쟁 당시, 일본 제국은 세계 해상 강국인 영국영일 동맹을 맺고 있었다.[31] 이 동맹으로 인해 러시아는 일본 함대의 기습 공격 가능성을 우려했다.[31]

러시아는 전 세계에 에이전트를 고용하여 일본 함대의 동향을 감시했지만,[32] 에이전트들은 포상금을 노리고 허위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았다.[32] 이들은 일본 어뢰정북해 해역에 매복하고 있다는 등의 정보를 보고했고, 일본 측이 거짓 정보를 흘렸다는 증언도 있다.[33]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아르카디 하팅과 러시아 수송선 ''바칸''으로부터 어뢰정에 대한 보고를 받고, 석탄 보급 속도를 높여 항해를 시작했다.

당시 러시아 함대는 공격에 대한 두려움, 일본 어뢰정 함대 주둔 소문, 기뢰 설치, 일본 잠수함 목격담 등으로 인해 극도로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11]

2. 3. 러시아의 오판

1904년 러일 전쟁 당시 일본 해군에 대항하기 위해 러시아 제국발트해의 발틱 함대 주력을 제2태평양 함대로 재편하여 극동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10월 15일,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이끄는 발틱 함대는 리바우 군항을 출발했다.[22]

당시 일본은 영국영일 동맹을 맺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는 일본 함대가 극동으로 가는 경로 어딘가에서 기습 공격을 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31] 러시아는 세계 각지에서 에이전트를 고용하여 일본 함대의 동향을 감시했으나,[32] 이는 오히려 화를 불렀다. 에이전트들은 포상금을 노리고 일본 어뢰정을 발견했다는 정보를 세계 각지에서 보내왔기 때문이다.[32]

스카게라크 해협을 빠져나와 북해로 진입한 발틱 함대는 신경과민 상태에 놓였다. 발트해를 벗어나면 영국의 제해권 아래에 놓이기 때문이었다. 러시아가 고용한 에이전트들은 이 해역에 일본 어뢰정이 매복하고 있다고 보고했고, 일본 측이 허위 정보를 흘렸다는 증언도 남아있다.[33]

도거 뱅크북해 위치.


러시아 정보 기관들은 제대로 조율되지 않았고, 부실하거나 허위 보고서를 작성하는 경향이 있었다.[3] 함대가 출발하기 전, 러시아 정보 요원들은 발트해 주변에 어뢰를 소지한 일본 장교들이 있으며, 영국이 일본에 어뢰정 6척을 건조했다는 주장을 펼쳤다.[4]

전날 함대가 풍선과 4척의 적 순양함을 발견했다는 주장과 "일본이 함대를 공격하기 위해 몰래 전 세계로 배를 보냈을 가능성" 때문에[5]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경계를 강화하고, "어떤 종류의 선박도 함대 사이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했다.[5]

사건 당시 다른 러시아 선박의 공격을 받은 러시아 순양함 ''아브로라''.


헐의 세인트 앤드루스 독으로 돌아온 후 손상된 어선들


적의 정보가 이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6] 주요 해군에서 최근 개발된 어뢰정은 대형 군함을 손상시키고 침몰시킬 수 있었고, 탐지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전쟁 중인 선원들에게 심리적 스트레스를 유발했다.

10월 20일, 로제스트벤스키는 아르카디 하팅으로부터 어뢰정이 노르웨이를 떠나는 것을 보았다는 보고를 받았다.[7] 그는 또한 러시아 수송선 ''바칸''으로부터 란겔란 벨트에서 "미젠마스트 상단에만 불을 켜서 멀리서 보면 어선으로 보일 수 있는 어뢰정 4척"에 대한 정보 보고서를 받았다. 그는 이 보고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석탄 보급 속도를 높이고 항해를 시작했다.

공격에 대한 일반적인 두려움, 덴마크 해안에 일본 어뢰정 함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소문, 일본이 바다에 기뢰를 설치했다는 이야기, 일본 잠수함 목격담 등 비슷한 사고와 소문이 러시아 함대에 영향을 미쳤다. 도거 뱅크 사건 전에 신경질적인 러시아 함대는 덴마크 해안 근처에서 러시아로 영사 파견물을 운반하는 어부들에게 발포하기도 했다. 다만, 러시아 함대의 형편없는 사격술 때문에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11]

존재하지 않는 기뢰를 항해한 후, 러시아 함대는 북해로 들어갔다. 10월 21일 저녁, 러시아 열의 맨 뒤에 있던 보급선 ''캄차카''(Камчатка)의 선장이 지나가는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선박을 일본 어뢰정으로 착각하고 공격받고 있다고 무선으로 통신하면서 재앙이 시작되었다.

3. 도거 뱅크 사건의 전개

10월 21일 저녁, 발틱 함대는 짙은 안개 속에서 도거 뱅크 부근을 항해했다. 이 시기 북해는 짙은 안개에 자주 휩싸였다. 공작선 캄차카는 기관 고장으로 함대에서 뒤처져 있었고, 기함 크냐지 수보로프에 "어뢰정에 추격당하고 있다"고 무선 통신을 보냈다.[25]

:'К · 스보로프: "몇 척? 어느 방향에서?"'

:'캄차카 : "사방에서"'

:'К · 스보로프 : "어뢰정은 몇 척인가? 자세하게 알려라"'

:'캄차카 : "어뢰정 8척"'

:'К · 스보로프 : '거리''

:'캄차카 : '1 케이블'(183m)

캄차카는 통신을 끊었고, 함대는 긴장했다. 10월 22일 오전 0시가 넘어, 갑자기 '전투 배치' 나팔이 울리고 "어뢰정이다, 어뢰 공격이다", "구축함이다, 우리는 당했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포수들은 공포에 젖어 어두운 바다를 향해 맹목적으로 발포했다. 함교에서는 적으로 보이는 등불이 확인되었고, 서로 발광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몇 척의 소형 기선이 탐조등에 비춰졌고, 이 중 한 척이 전함 알렉산드르 3세를 향해 돌진해 오는 것 같았다. '알렉산드르 3세'와 '크냐지 수보로프'는 소형 기선에 포탄을 퍼부어 격침시켰다.

로제스트벤스키는 그제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깨닫고 "잘도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했구나! 잘 봐라! 저것은 어선이다."라고 외쳤다.

3. 1. 캄차카 호의 오인 보고

10월 21일 저녁, 발트 함대는 짙은 안개 속에서 도거 뱅크 부근을 항해했다. 이 시기 북해는 아침, 저녁으로 짙은 안개에 자주 휩싸였다. 공작선 캄차카는 함대에서 100km 이상 앞서가고 있었으나, 기관 고장으로 뒤처져 행방불명 상태였다. 같은 날 오후 8시 45분, 캄차카는 기함 크냐지 수보로프에 "어뢰정에 추적당하고 있다"라는 무선 통신을 보냈다.[25]

:К · 스보로프: "몇 척? 어느 방향에서?"

:캄차카: "사방에서"

:К · 스보로프: "어뢰정은 몇 척인가? 상세하게 알려라"

:캄차카: "어뢰정 8척"

:К · 스보로프: ‘거리’

:캄차카: ‘1 케이블’(183m)

이후 캄차카는 통신을 끊었고, 함대는 긴장감에 휩싸였다.[25]

3. 2. 오인 사격

10월 21일 저녁, 발틱 함대는 짙은 안개 속에서 도거 뱅크 부근을 항해하고 있었다. 이 시기 북해는 짙은 안개에 자주 휩싸였다. 공작선 '캄차카'가 100여 km 앞서가고 있었지만, 기관 고장으로 뒤처져 행방불명 상태였다. 21일 오후 8시 45분, '캄차카'는 기함 '크냐지 수보로프'에 "어뢰정에 추격당하고 있다"고 무선 통신을 보냈다.

:'К · 스보로프: "몇 척? 어느 방향에서?"'

:'캄차카 : "사방에서"'

:'К · 스보로프 : "어뢰정은 몇 척인가? 자세하게 알려라"'

:'캄차카 : "어뢰정 8척"'

:'К · 스보로프 : '거리''

:'캄차카 : '1 케이블'(183m)

'캄차카'는 통신을 끊었고, 함대는 긴장했다. 22일 오전 0시 넘어, 갑자기 '전투 배치' 나팔이 울리고 "어뢰정이다, 어뢰 공격이다", "구축함이다, 우리는 당했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포수들은 공포에 젖어 어두운 바다를 향해 맹목적으로 발포했다. 함교에서는 적으로 보이는 등불이 확인되었고, 서로 발광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몇 척의 소형 기선이 탐조등에 비춰졌고, 이 중 한 척이 전함 '알렉산드르 3세'를 향해 돌진해 오는 것 같았다. '알렉산드르 3세'와 '크냐지 수보로프'는 소형 기선에 포탄을 퍼부어 격침시켰다.

로제스트벤스키는 그제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깨닫고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잘도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했구나! 잘 봐라! 저것은 어선이다."

도거 뱅크에서는 어업이 번성했고, 영국 항구에서 40 ~ 50척의 트롤 어선이 매일 같이 출어했다. 어선은 100톤 정도로 각각 8~9명이 탑승해 있었다. 어선단은 '싸움닭 함대'(Gamecock fleet영어)라고 불렸지만, 비무장 민간 선박이었다. 이날도 평소와 같이 '싸움닭 함대'가 도거 뱅크에서 조업을 하고 있었는데, 멀리서 군함이 보였고 그 후 갑자기 발포를 해왔다. 어민들은 놀라서 자신이 누구인지 보여주기 위해 큰 가자미를 흔들었다. 동료는 대구를 흔드는 등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어선은 어망을 절단하고 피하려고 했지만, 불행하게도 러시아 함대에 접근해 있었기 때문에 '크레인 호'가 맹렬한 공격을 받아 침몰했고, 선장과 승무원 1명 총 2명이 사망했다. '마이노 호'에서도 6명이 부상당했고, 그 중 1명은 반년 후에 사망했다.[8]

혼란 속에서 러시아 함선들은 서로를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다. 순양함 아우로라와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일본 군함으로 오인되어, 대형을 이루어 항해하던 7척의 전함으로부터 포격을 받아 두 함선 모두 손상되었고, 군목 1명과 최소 1명의 선원이 사망하고 다른 1명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11] 전함 '오룔'은 6인치포 17발과 그 외에 포탄 500발을 발사했다. '오룔'에서 발사된 포탄 가운데 5발이 방호순양함 '아우로라'에 명중했고, 종군 사제가 한쪽 팔을 잃는 중상을 당하고 후일 사망했으며 여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장갑순양함 '드미트리 돈스코이'도 피해를 입었다.[11] 이 혼란 속에서 여러 러시아 함선에서 어뢰가 명중했다는 신호가 왔고, 보로디노 전함에서는 일본군이 배에 탑승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 일부 승무원들은 구명조끼를 입고 갑판에 엎드려 누웠고, 다른 승무원들은 커틀러스를 꺼냈다. 러시아 포술의 극도로 낮은 수준으로 인해 양측의 더 심각한 피해는 피할 수 있었는데, '오룔' 전함은 아무것도 맞히지 못한 채 500발 이상의 포탄을 발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10분간의 사격 후, 어부들은 마침내 군함 중 한 척에서 청색 신호등을 보고 사격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9][8]

3. 3. 영국 어선 피해

10월 22일 새벽, 도거 뱅크에서 조업 중이던 영국 트롤 어선단 '싸움닭 함대'(Gamecock fleet)는 러시아 발틱 함대의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았다.[26] 이들은 헐 항구에서 출항한 40~50척의 어선으로, 각 배에는 8~9명의 선원이 타고 있었다. 어선들은 비무장이었지만, 러시아 함대는 이들을 일본 어뢰정으로 오인하여 포격을 가했다.

어부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 알리기 위해 큰 가자미와 대구를 흔들었지만 소용없었다.[26] 어선들은 어망을 끊고 도망치려 했으나, '크레인 호'가 격침되어 선장 조지 헨리 스미스와 승무원 윌리엄 리처드 리젯이 사망했다. '마이노 호'에서도 6명이 부상을 입었고, 그 중 월터 웰프턴은 6개월 후 사망했다. 다른 어선 4척도 손상되었다.

영국 어선 피해 현황
선박명피해 내용사망자부상자
크레인 호침몰2명-
마이노 호선체 파손-6명 (1명은 6개월 후 사망)
기타 4척선체 파손--


4. 사건의 여파와 국제적 반응

조기를 게양하고 헐 항구로 귀항한 어선과 희생자 구조 없이 떠나버린 발트 함대의 행동은 영국 여론을 격노하게 했다. 이 사건은 트라팔가 해전 기념일에 발생하여 더욱 큰 분노를 일으켰다. 트라팔가 광장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언론과 국왕 에드워드 7세는 러시아 해군을 "해적", "미친 개", "가장 비겁한 폭행 사건"이라며 강하게 비난했다.[27]

영국 해군은 순양함대를 출격시켜 스페인의 비고 항구까지 발트 함대를 추적했다. 영국 정부는 스페인 정부에 발트 함대에 석탄은 물론 깨끗한 물조차 공급한다면 중립 위반으로 간주하겠다는 경고를 보내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4. 1. 영국 여론의 분노

어선이 반기를 걸고 헐 항구에 귀항하자 사람들이 무리지어 몰려왔다. 더 난처한 사실은 발틱 함대가 피해자를 구출하려고도 하지 않고 떠나 버렸다는 것이었다. 트라팔가 해전 기념일에 발생한 이 사건에 대해 영국 여론은 격앙되었다. 군중들은 트라팔가 광장에 모여 야만인들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취하도록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신문은 발틱 함대를 ‘해적’, ‘미친 개’라고 비난했고, 국왕 에드워드 7세는 “가장 비겁한 폭행 사건이다”라고 보고서의 여백에 추가로 썼다.[27]

한편 일본의 주가는 올랐다. 헐 시티에서 사망한 어부의 장례식이 열린 날, 시기를 놓치지 않고, 도쿄시오자키 유키오조전을 보냈다. 주영 일본 공사 하야시 다다스는 도거 뱅크에서의 사건에 “일본인은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는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도버 해협을 모르는 척 통과한 발틱 함대에게 영국 해군은 순양함대를 출격시켰고, 스페인의 비고 항구까지 추적했다. 영국 정부는 스페인 정부에 대해 발틱 함대에게 석탄은커녕 마실 물까지도 공급한다면 중립 위반이라는 경고를 보내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일부 영국 신문들은 러시아 함대를 '해적'이라고 불렀고,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영국 어부들의 구명정을 떠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심한 비판을 받았다. 아침의 ''타임스'' 사설은 특히 신랄했다.

4. 2. 외교적 긴장 고조

어선이 조기 게양을 하고 헐 항구로 귀항하자 군중이 몰려들었다. 게다가 더 심각한 것은 발트 함대가 희생자를 구출하려 하지 않고 떠나버린 것이다. 트라팔가 해전 기념일에 발생한 이 사건에 대해 영국 여론은 격노했다.

군중은 트라팔가 광장에 모여 러시아 해군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며 데모를 벌였다. 신문은 발트 함대를 "해적", "미친 개"라고 비난했고, 국왕 에드워드 7세도 "가장 비겁한 폭행 사건이다"라고 보고서 여백에 덧붙였다.[27]

한편 일본 주식은 상승했다. 헐 시에서 사망한 어부의 장례식이 열린 날, 때를 놓치지 않고 도쿄시오자키 유키오 시장으로부터 조전이 보내졌다. 주영 일본 공사 하야시 타다스는 도거 뱅크 사건에 일본인은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공식적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도버 해협을 모른 체 통과한 발트 함대에 대해 영국 해군은 순양함대를 출격시켜, 스페인의 비고 항구까지 추적했다. 영국 정부는 스페인 정부에 대해 발트 함대에 석탄은 물론 깨끗한 물조차 공급한다면 중립 위반으로 간주하겠다는 경고를 보내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 긴장이 흘렀다.

4. 3. 일본의 반응

일본의 주가는 올랐다. 헐 시티에서 사망한 어부의 장례식이 열린 날, 오자키 유키오 도쿄시 시장은 조전을 보냈다.[27] 주영 일본 공사 하야시 다다스는 도거 뱅크 사건에 일본인은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공식적으로 성명을 발표했다.[27]

5. 사후 처리와 영향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발트 함대의 행동에 대해 "해상에 2척의 어뢰정이 있었기 때문에 우발적으로 발생했다"고 설명하며 희생자들에게 애도를 표했다.[28] 영국에서는 일시적인 흥분은 가라앉았다.

12월 파리에서 국제 심사 위원회가 개최되었고, 이 심사 보고서에서는 "캄차카"호가 사건 전에도 여러 척의 외국 선박에 대해 발포했던 사실이 밝혀졌다.[29]

러시아 정부는 사망 또는 부상한 어부에게 65000GBP를 보상금으로 지불하고, 침몰한 트롤 어선 대신 새로운 선박을 제공하는 데 동의했다.

5. 1. 국제조사위원회

국제 조사 위원회 회기


파리 회담장 앞에서 증언을 하기 위해 참석한 영국 어부들


1904년 11월 25일, 영국과 러시아 정부는 이 사건을 헤이그 협약에 따라 국제조사위원회에 회부하기로 합의했다.[18] 1905년 1월 9일부터 2월 25일까지 파리에서 국제조사위원회가 열렸다.[19]

국제조사위원회는 보고서에서 "위원들의 결론은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나 그의 함대 인원에게 어떤 불명예도 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또한 "위원들은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사건 처음부터 끝까지 어선으로 확인된 트롤선에 함대가 포격을 가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는 점을 만장일치로 인정하게 되어 기쁘다"라고 덧붙였다.[20]

조사 결과, '캄차카'가 사건 이전에도 여러 척의 외국 선박에 발포한 사실이 드러났다.[29]

최종적으로 러시아 정부는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어부들에게 65000GBP를 보상금으로 지불하고, 침몰한 트롤 어선 대신 새 선박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5. 2. 배상과 화해

러시아 정부는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어부들에게 65000GBP를 보상금으로 지급하고, 침몰한 트롤 어선 대신 새로운 선박을 제공하는 데 동의했다.[29] 1906년에는 킹스턴 어폰 훌에 세 명의 영국 선원의 죽음을 기리는 어부 기념비가 세워졌다. 높이 약 약 5.49m인 이 기념비는 사망한 어부 조지 헨리 스미스를 보여주며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어부 기념비

5. 3. 쓰시마 해전에 미친 영향

이 사건으로 영국에서는 시민들 사이에 반러시아, 친일 감정이 강해졌다. 영국 본토와 식민지들은 러시아 발틱 함대의 입항을 거부했다. 또한, 당시 배의 주 연료였고 영국이 대부분을 공급하던 무연탄의 보급도 막았다.[2] 이는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함대의 속도를 몇 노트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고, 일본이 일방적으로 승리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발틱 함대는 동해로 가는 동안 제대로 된 보급을 받지 못해 승무원들이 매우 지쳐 있었다.

참조

[1] Harvp 1911
[2] Harvp 1988
[3] 서적 The Tsar's Last Armada Basic Books 2002
[4] 서적 The Tsar's Last Armada Basic Books 2002
[5] Harvp 1969
[6] Harvp 1969
[7] 서적 The Tsar's Last Armada Basic Books 2002
[8] 서적 The Tsar's Last Armada Basic Books 2002
[9] 웹사이트 The dogger bank incident in 1904 – The Russian fleet attacks Hull trawlers http://www.scarborou[...]
[10] 서적 The Tsar's Last Armada Basic Books 2002
[11] 웹사이트 Dogger Bank – Voyage of the Damned http://www.hullwebs.[...] 2007-09-08
[12] 서적 The Tsar's Last Armada Basic Books 2002
[13] 서적 The Tsar's Last Armada Basic Books 2002
[14] 서적 Official history, naval and military, of the Russo-Japanese War. Prepared by the Historical section of the Committee of Imperial Defence https://archive.org/[...] His Majesty's Stationery Office
[15] 서적 The Tsar's Last Armada Basic Books 2002
[16] 간행물 British Assistance to the Japanese Navy during the Russo-Japanese War of 1904-5 Australian Association for Maritime History 1980-04
[17] 웹사이트 Battle of Tsushima https://www.britanni[...] 2023-11-27
[18] 웹사이트 Joint British-Russian declaration http://www.worldcour[...]
[19] Harvp 1974
[20] 웹사이트 Dogger Bank Incident Final Report http://www.worldcour[...] 2016-03-20
[21] Harvp 1999
[22] 문서 現在の[[エストニア]]のリエパーヤ
[23] 문서 『「坂の上の雲」では分からない日本海海戦―なぜ日本はロシアに勝利できたか』, p.225
[24] 문서 『対支回顧録 下巻 列伝』[[東亜同文会]]内対支功労者伝記編纂会、1936年、は、[[瀧川具和]](海軍少将)の項(677~679頁)に、「三十五年一月独逸公使館附に転じ伯林駐在中日露戦役に際会し、陸の明石大佐と駢んで所謂裏面の勲功を樹てた。其の詳細は今日知る由もないが、魯国の革命派を操縦して各地に小規模の反乱を起させ、海軍にはオデツサの黒海艦隊の内乱あり。波羅的艦隊の東航予定(三十七年六月出発の筈であつた)を延期せしめ、十月漸くリバウを抜錨するや君は日本水雷艇北海方面にありとの偽宣伝を流布せしめ、或は漁船を傭うて艦隊襲撃の真似事を目論む等、露国側に動揺を与へ以て海陸の極東集中を困難ならしめんとした。」と記す。
[25] 문서 『日露戦争全史』, p.461
[26] 문서 『日露戦争全史』, p.462
[27] 문서 『日露戦争全史』, p.463
[28] 문서 『日露戦争全史』, p.468
[29] 문서 松井芳郎はこの処理手段に関して、この「審査」という制度は[[1899年]]の国際紛争平和的処理条約によって初めて規定されたものであったが、ドッガーバンク事件を解決したことで注目を集めた結果、[[1907年]]改正の[[国際紛争平和的処理条約]]でより詳しく規定されることとなった、と国際法における事件の重要性を述べている。松井芳郎ほか『国際法』第5版、有斐閣、2007年。p.266。
[30] 서적 The War of the Rising Sun and Tumbling Bear http://books.google.[...] Routledge 2008-12-01
[31] 문서 Busch p. 90, 91
[32] 문서 Busch p. 121
[33] 문서 『対支 회고록 하권 열전』[[東亜同文会]]内対支 공로자 전기편집회. 1936년, [[타키 토모카즈]](해군소장) 절(677~679쪽에, 「35년 1월 독일공사관 부표로 전환하여 베를린 주재하던 중 러일전쟁이 발발하였고, 육군의 [[아카시 모토지로]] 대좌와 나란히 소위 이면에 훈공을 더했다. 그 자세한 내용은 오늘 날 알 수 없지만, 해군 흑해 함대에 내란이 있었다. 波羅的艦隊の東航予定(37년 6월 출발の筈であつた)を延期せしめ、10월漸くリバウを抜錨するや君は日本水雷艇北海方面にありとの偽宣伝を流布せしめ、或は漁船を傭うて艦隊襲撃の真似事を目論む等、露国側に動揺を与へ以て海陸の極東集中を困難ならしめんとした。」と記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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